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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Hannah_ko 2023. 9. 24.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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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구글도서)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 케이틀린 도티

 

 

웨스트윈드의 두 개의 레토르트

첫 장은 저자가 화장 회사(웨스트 윈드)에 처음 출근해서 맞게 된 업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유년 시절부터 왠지 모르게 죽음에 사로잡혔던 저자는 죽음, 질병 등에 관심을 가졌던 학창 시절을 지나 종국에, 화장장에 취업하게 된 것이다. 기대감에 가득 찬 그녀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시체를 화장하는 것과 같은 근사한(?) 일이 아닌 시체를 면도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이 낯설게 느껴졌던 건 비단 그녀가 다른 이에게 면도해주는 것이 처음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시체와의 첫 조우에서 기대감이 약간의 실망과 희열로 바뀐 것이다.

그녀가 화장 회사에서 맡은 두 번째 업무는 얼굴에 거미줄처럼 곰팡이가 핀 30대 초반 여성의 화장이었다. 이 여성은 희귀 질환에 걸려 사망 후 대학 부속 병원에서 여러 차례 실험을 받아 부패가 꽤 진행된 상태였다. 부패가 진행된 시체를 두 번째 근무일에 만나게 된 것은 분명 그녀에게 쉽지 않은 경험이었을 것이다.

이 시신뿐만 아니라 이후 웨스트 윈드에서의 일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처음에 가졌던 화장터 직원의 환상은 없어지고 평범한 직장인들처럼 점심시간 같은 일들을 기다리게 되기도 했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았던 건 유가족들이 만약 자신이 점심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게 될까 하는 생각에 원하는 식당에 가기조차 어려웠다. 물론 30분이라는 점심시간은 그녀의 원초적인 본능을 일깨우기엔 충분했다. 또 회사 안에는 거대한 냉장 트럭이 있는데 그곳에는 화장할 시신들이 “시체 박스”에서 대기하고 있다. 이 시신들은 순서대로 화장로 안으로 들어가며 그 과정은 단순했다. 화장로에서 시신들을 화장하는 작업이 익숙해지고 재에 뒤 덥히는 날들이 반복되고 나니 그녀는 화장 작업이 마냥 낯설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항상 일어나는 일이지만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라는 엔쿄 패트 오하라의 조언을 이해하게 되었다.

 

 

 

쿵소리

3장에 들어서야 저자인 케이틀린이 죽음에 집착하게 된 이유가 나오게 된다. 그건 쇼핑몰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2층에서 1층에 있는 아빠를 보며 인사할 때 반대편에 서있던 여자아이가 10미터 아래로 “쿵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한 이후로 케이틀린은 항상 “쿵소리”를 듣게 되었다. 죽음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란 걸 깨닫게 된 후 케이틀리는 공포와 두려움에 강박적인 행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언제나 그녀의 주위에 죽음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런 두려운 상황에서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잠긴 문을 여러 번 확인한다든지 셔츠 끝쪽에 입을 대고 침을 뱉는 다든지 다양한 방법을 반복하게 된다.

강박은 어떤 두려운 상황에서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반복된다고 한다. 강박적인 생각과 행동은 그 불안함의 원인을 노출해서 치료하곤 한다. 불안한 상황을 일부러 접하고 그 뒤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고 자신이 안전하다는 상황을 겪게 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그녀는 그런 치료를 받진 못했지만, 케이틀린이 결국 화장터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 일종의 치료가 되는 것이다. 또 그녀는 어린 시절 겪었던 그 한 번의 경험(특별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일어난 경험)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경험들로 채워졌으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너무나 당연한 죽음의 과정을 우리의 의식 아래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죽음의 무도

요즘 사람들은 죽음에 익숙하지 않다. 집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과거와 달리 집 밖에서 죽음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전쟁과 같은 갑작스러운 죽음은 다양한 문제들을 일으키곤 했는데 특히 시체는 위생적인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그 과정은 철저히 일상생활에서 분리되어야 했다. 이후 당연하게도 현대의 장례식은 종교적이나 전통적인 의미보다는 과정과 효율의 작업으로 변화게 되었다. 상업적인 의미만 남게 된 것이다. 많은 과정이 상업화될수록 죽음, 장례라는 문화는 전문화되고 가족들이 “집” 안에서 “직접” 할 수 없는 일들이 되었다.

장례를 처리할 상황이 변함에 따라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진다. 비관주의가 강한 문화권에는 시신이나 장례를 숨기거나 피하려고 한다. 반대로 낙관적인 문화권에서는 시신의 얼굴에 화장해준다거나 방부 처리를 해서 시신을 미화시킨다. 빠르고 편리하게 간소화되고 화학화(?)된 현대의 문화를 가지게 사람들은 다른 문화권의 장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혐오하곤 한다. 시신을 먹은 식인을 한다거나 자연 속에서 동물들의 먹이가 되게 하는 문화는 언뜻 보기에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 문화권 사람들이 얼마나 진심으로 그 행동을 하는지 지켜보게 된다면 그 문화를 존중할 수 있다. 정말로 중요한 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그 방법이 어떻게 되었든 죽은 사람들을 대하는 가족들의 마음이다. 장례 문화가 발전할수록 개별화된 상품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시신과 유가족들의 감정이 담기거나 의미가 담기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저자가 책 전반에 걸쳐 강조하는 내용이 있다. 우리는 앞으로 시신이 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죽으면 모든 이는 공평해지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 같은 대우를 받을 필요는 없다.

유가족들, 적어도 자기 자신에 대한 장례 과정을 미리 선택하고 죽음이라는 단어나 과정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그제야 모두 죽음 앞에 공평해질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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